레트로(Retro). 회상, 추억이라는 뜻의 영어 ‘Retrospect’의 준말이다. ‘복고(復古)’로 번역되기도 하니 ‘오래된 것을 되돌리다’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회상, 이 말이 요즘 ‘옛날의 상태로 돌아가거나 과거를 그리워하여 본뜨려고 하는 것'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이해할 수 도 있다.
즉 단순히 옛 것에 대한 향수 때문에 과거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 담성에 맞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는 의미다. 현대 문명에서 느껴지는 속도감의 불안 대신 친숙함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장치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오늘은 고현학(考現學)의 다리를 지나 ‘레트로’ 박물관 속으로 곧장 걸어가 볼 참이다. 정선 ‘추억의 박물관’의 진용선 관장을 찾아가는 길은 아라리 가락처럼 아련했다. 독일문학을 전공한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독일문화운동에서 용기를 얻어 귀향한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그를 고향으로 불러들인 건 ‘그리움’이라고들 했다. 그리움이 아리랑이 되고, 거기에 역사와 추억이 스며들어 묘한 화학작용을 일으킨 곳이 그의 고향 정선이다. 정선에서는 추억으로든 아리랑으로든 진용선 관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지만, 오늘은 아리랑을 애써 걷어낸 그 의 맨얼굴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조금은 헛헛했다.
‘추억의 박물관’의 시작은 2004년 12월 정선군 신동읍 방제리 매화분교 자리에 문을 연 정선아리랑학교에 다목적 문화공간이 생기면서부터였다. ‘딱지와 삐라의 추억’, ‘노래책으로 본 역사’, ‘한국전쟁과 아리랑’ 등 솔깃한 느낌의 전시물, 독특한 주제의 기획전, 갖가지 공연 등으로 일찌감치 지역명소가 되었다. 그곳 정선군 신동읍 일대를 한국 석탄산업의 출발지로 삼은 시절부터 탄광개발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던 좋은 시절에 이어 그 이후 폐광에 이르는 시기까지의 연대기도 놓치지 않았다.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은 2017년 4월이다. 이곳 역시 1990년대 초반까지 석탄산업으로 풍요를 누리던 함백역 근처 안경다리 마을이다. 지상 2층의 새 건물이 새로운 추억을 쌓아가겠다는 듯 산뜻하다. 강원도 최초의 근현대사박물관으로 짊어질 책임감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전 기념으로 마련한 ‘함백역,
60년의 기록 특별전’도 잔잔한 감동을 전하고 있다. 1957년에 개역한 뒤 50여년의 역사를 지닌 함백역 복원을 위해 애쓰던 그가 당연히 해야 할 전시회였다. 한밤중에 내려도 ‘하나도 무섭지 않던’ 함백역에 대한 추억을 한데 모았다. 안경다리 마을이 예전 탄광촌과 광부들의 삶의 현장으로 재현, 복원되고 있는 상태여서 함백의 역사가 녹아 있는 이곳 ‘추억의 박물관’은 더욱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진 관장은 ‘추억의 박물관’을 ‘가난한 시대에 억척스러운 희망을 품었던 곳’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레트로니 아날로그니 이런 말들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흘러간 옛 노래라고 하기엔 ‘추억의 박물관’은 너무도 생생하게 빛났다. 그는 우리 삶에 깊이 숨은 시간의 흔적을 실감 나게 재현해 내는 중이었다. 그 마중물은 정선아리랑연구소와 아리랑아카이브가 소장한 1만여 점의 자료다. 전시실은 ‘대한제국의 몰락과 일본의 식민통치’, ‘해방과 한국전쟁’, ‘5·16 정변 시기와 1970년대’, ‘대중잡지와 만화’, ‘학창 시절의 추억’ 등으로 구성되어 ‘자칫하면 사라질’ 역사기록물의 가치와 소중함을 알게 한다. 향수를 불러일으켜 열린 문화공간이 되겠다는 생각이 든든하기 그지없다. 문화유산을 기억하고 체험하는 명소가 되겠다는 생각 또한 마찬가지다.
‘추억의 박물관’은 별+아이의 합성어 ‘별아해’를 상징으로 해 로고도 만들었다.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꿈과 추억의 별이 빛나고 있다는 의미다. 그것 또한 방문객에게 따뜻한 감동으로 이어지리라. 그동안 아리랑학교 교육프로그램 ‘동네야 놀자’로 지역문화의 원형을 찾고, 박물관에 대한 지역의 관심을 꾸준히 높여왔다. 철저한 아날로그로서 포털사이트가 선정한 ‘가보고 싶은 박물관’ 3위에 오른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수요가 있다는 방증 아닌가. ‘호모 아리랑쿠스’. 아리랑연구소 소장이자 아리랑박물관 관장이며, ‘추억의 박물관’ 관장인 진용선 관장을 나는 그렇게 부른다. 아리랑으로 그를 기억하는 편이 더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움은 우리의 옛날을 소환하는 멋진 장치이고, 그는 고향땅에서 아리랑으로 그리움을 쌓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왔으니, 그와 함께 추억 속의 신인류(新人類)가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돌아오면서 그를 고향으로 부른 ‘그리움’을 다시 기억했다. 멀리 끝 간 데 모르는 소중한 인연길이 보인다.
✽‘추억의 박물관’은 2019년 12월 31일부로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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